121년 전 10월 27일, 고종은 왜 대한적십자사를 만들었을까?
1905년 10월 27일 칙령 제47호로 출범한 대한적십자사. 고종의 구호 활동과 국가 주권의 고민, 일제의 강제 폐지, 임시정부의 재조직과 광복 이후 재건을 실제 역사 사진과 기록으로 살펴봅니다.
고종 황제가 붕대를 든 자원봉사자를 상상하며 적십자사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저 따뜻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1905년의 대한제국은 나라의 운명 자체가 흔들리던 때였습니다. 2026년 10월 27일은 그해 대한적십자사가 설립된 지 꼭 121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조직의 탄생과 재건 과정을 함께 살펴보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일이 어떻게 나라의 역사와 이어졌는지 보입니다.
1905년 10월 27일, 고종이 반포한 칙령 제47호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했습니다. 그 뒤 고종 황제는 1905년 10월 27일 칙령 제47호인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공식 창립일로 삼는 바로 그날입니다. 대한적십자사 연혁에 따르면, 고통받는 병자와 부상자를 구호하는 인도주의적 목적과 더불어 대한제국이 독립된 주권국가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뜻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오늘날과 완전히 같은 제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고종은 칙령 제54호 「대한국 적십자사 관제와 규칙」을 반포하며 기존 제47호 규칙을 폐지하고 체계를 다시 정했습니다. 고종실록에 남은 이 규칙은 전쟁 때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다치거나 아픈 사람을 돌보고 치료해 고통을 덜어준다는 목적을 밝힙니다. 기관 창설 날짜와 뒤이은 제도 정비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적십자사가 설립 4년 만에 사라진 이유
그런데 대한적십자사는 오래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1909년 7월 23일에는 칙령 제67호로 대한적십자사가 폐지되어 일본적십자사에 강제로 통합됐습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세운 조직조차 자기 이름과 운영 권한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적십자사는 정치적 갈등에서 부상자와 환자를 보호한다는 국제 인도주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적십자 조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지는 그 시대의 국가적 상황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다시 시작된 이름
대한적십자사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3·1운동으로 독립 의지가 분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회」가 다시 조직됐습니다. 임시정부 아래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며, 해외 동포들을 구제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구호와 독립운동이 같은 시대의 과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당시 상하이의 임시정부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일부터 국제사회에 독립을 알리는 일까지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식에 참석한 인물들을 담은 실제 기록입니다. 대한적십자회 응급구호반의 사진과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적십자회가 재조직되어 활동하던 시기의 사람들과 시대 분위기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949년, 다시 맞은 10월 27일
광복 후 적십자운동을 되살리는 노력이 이어졌고, 1949년 4월 30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이 공포됐습니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대한적십자사 창립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설립의 시작점이었던 1905년 10월 27일과 날짜가 같았습니다. 이후 대한적십자사는 한국전쟁의 피난민 구호와 재난 대응, 혈액 사업 등에서 역할을 넓혀 왔습니다.
121년 뒤 우리가 기억할 것
오늘 적십자사를 떠올리면 헌혈과 재난구호가 먼저 생각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의 시작에는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려는 마음, 그리고 독립국가로 인정받으려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도 담겨 있습니다. 1905년의 창립, 1909년의 강제 폐지, 1919년의 재조직, 1949년의 재건을 차례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긴 역사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계속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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